2009. 11. 19.

전국시대(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BC 403~221)
  BC 403(또는 475)년부터 진나라가 통일 할 때 까지의 시기. 이 시기를 다룬 역사서 '전국책(戰國策)'에서 따와 전국시대라 불린다.

 춘추 시대를 거치며 정립된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툰 시기.

 춘추 시대의 작은 소국들은 서로 정벌하며 몇개의 나라로 정립되었다.
 초기에는 위나라가 패권을 그뒤 제나라가 패권을 가져갔으나 연과 진이 강성해지며 7개국이 패권을 다투는 형태로 발전.
 7개국은 전국칠웅이라 불리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진나라가 모든 국가를 제압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 시기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군주에 의해서 책임자가 임명되었고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정착된다.
 정치,군사적 혼란 가운데에도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고. 천문,역법,수리,토목,건축,공예에서도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춘추시대부터 발전한 철기의 여파가 큰 파급 효과를 줬다고 한다.

 

 BC 403년 진(晉)나라의 세족(世族) 위(魏),한(韓),조(趙)씨가 진나라의 영토를 나눠 각각의 국가를 세움.
               주왕실에 공인을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이때 완전히 봉건제도가 붕괴되었고 주왕조 권위가 떨어진 것으로 본다.
               각 국은 자신이 왕임을 자임하였다.
 BC 340년 전국 초기부터 강성했던 위나라가 진의 공격으로 도읍을 옮김.
 BC 318년 초나라가 날로 강대해지는 진나라를 견제하고자 진나라 동쪽의 위,조,한,연,제등과 동맹하는 합종책(合從策,또는 합종설)을 펴자
               이에 진나라는 각국과 따로따로 동맹을 맺는 연횡책(連橫策,또는 연횡설)로 맞대응해 초나라의 의도를 무력화시키고 동맹과 침략을 통해 우위를 유지한다.
 BC 260년 장평(長平) 싸움으로 조나라에 대해 승리한 뒤 초,조,한,위 연합 역시 물쳤다.
 BC 223년 진이 초나라를 꺾음.
 BC 221년 진나라 전국을 통일.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고 하는 생각때문에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멸망해도 부흥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서는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고 한다.

 

합종연횡(合從連衡) 

소진의 합종설과 장의의 연횡설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전국 칠웅(戰國七雄) - 중국 전국 시대의 일곱 제후
 진(秦),초(楚),연(燕)의 3개 강대국과 한(韓),위(魏),조(趙),제(齊:田齊)의 4개 신흥국으로 구성되었다.
 - 한,위,조는 진(晉)나라의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3등분 되어 세워진 나라
 - 제 나라 역시 그동안 제위에 올랐던 강씨가 아닌 전씨가 기득권을 잡았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 사상가들의 교단과 저작물의 총칭.

- 인물 :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순자(荀子)
- 학파 :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2009. 11. 7.

춘추시대

춘추시대(春秋時代,BC 770~403)

 짧게는 춘추라고도 한다. 공자가 쓴 역사책 '춘추'가 이 시대의 일을 서술한데서 붙여진 이름.

 중국 주나라가 견융족의 침입으로 도읍을 동쪽으로 옮긴 때를 시작으로 약 360년간 전란의 시대를 말한다.

 

  주나라가 왕실을 동쪽으로 옮겨가 세력이 약해지자 중원의 제후국들은 느슨해진 영향력 아래에서 점차 힘을 확대했다.
자신의 세력권안의 읍이나 국가를 복속시켜 나간 것으로 주나라 말기 800개 가까이 되던 나라들은 춘추시대에 수십개로 줄어들었다.
각 국은 주변국을 정복해 나가며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했다.
이 정복전에서 군주는 토지를 장수나 관리에 영지로 주지 않고 현으로 이름 붙여 왕이 직접 다스리는 방식을 택한다.
(초기에 진이나 초나라가 시작했다고도 하며 봉건제도가 붕괴되어 군현제로 들어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각 지역의 맹주들은 허약해지기는 했으나 명분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나라에 이름을 높이며 자신의 지역에서는 권력을 확대했다. 
강력한 제후들은 회맹 외교를 펼치기도 했는데 제후 가운데 가장 강한자가 패자(황제로부터 일정한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제후의 우두머리)로서 회맹을 주최했다.
회맹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중원을 통제했으며 이런 회맹외교로 상호간 세력간의 균형을 도모했다.
그 중 춘추오패(제,진,초,오,월나라)가 세력이 가장 컸다.
이런 모임은 힘의 균형뿐아니라 남쪽의 강력한 세력인 초(楚)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BC 658~657 - 초가 정(鄭)나라를 침입.  제나라 환공(桓公)이 이듬해 제후들을 이끌고 초를 물리침
BC 651 - 제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邱)의 회-(환공이 죽고 제나라는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진나라가 강해짐)    
BC 633 - 초가 북진. 진나라가 성복에서 초를 격파.
BC 632 - 진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문공이 죽고 진나라역시 내분으로 약화)
BC 587 - 초나라가 진(陳)과 함께 송나라를 침공을 시작해 여러나라를 정벌해 북방의 패자가 됨.
             초나라가 들어오면서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 주나라 왕실은 무시되기 시작한다.
BC 506 - 오나라 합려(閤閭)가 초의 도읍인 영을 함락.
BC 482 - 오나라 부차(夫差)가 맹주의 지위에 오름.
BC 473 - 오나라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멸망. - 월은 BC 334년 초나라에 멸망.
BC 403 -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음.
             춘추와 전국시대의 경계로 본다.
(BC 453년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실질적인 3국의 분립이 성공시기를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 주나라가 도읍을 옮긴 일에대한 서술에서 '동천'이라고도 한다.
** 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
*** 春秋五覇 - 제(齊)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 (진 목공, 송 양공, 오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춘추(春秋)
공자가 쓴 편년체(=기년체.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 역사서.
유교 5경의 하나. BC 722~479년까지 모국인 노(魯)나라의 12제후 시기의 주요사건들을 기록한 것.
주석서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공양전, 公羊傳','곡량전, 穀梁傳'이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가 지은 병법서. 아직도 병법서 최고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당시 병가 사상을 볼 수 있고 합려와의 일화도 들어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성어로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BC 496 합려가 월나라 원정중 실패하고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죽자 그 아들 부차가 유언에 따라 복수를 위해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했다.

 부차는 월나라에 복수를 하고 구천을 사로잡아 월왕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구천과 신하 범려등을 비굴한 행색으로 만들었다. 구천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치욕을 감수했고 결국 신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차는 그를 월나라로 돌아오냈다.

 

 구천은 돌아온 날부터치욕을 되갚아줄 날만을 기다린다.
그는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너는 회계의 치욕(會稽之恥,회계지치)을 잊었느냐!”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북진에 정신이 쏠린 틈을 노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부차는 자살하게 해 치욕을 되갚았다.

2009. 10. 25.

체첸 분쟁

러시아-체첸 분쟁

체첸 전쟁,체첸 사태, 체체니아 분쟁,일부에서는 체첸 내전으로도 불리운다.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으로 출범하는 시기.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체첸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선포하자, 이에 대해 러시아 연방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사건. 체첸이 분리 독립하는 것이 여타 소수민족ㅡ러시아는 12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ㅡ의 분리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카프카스 지역과 카스피 해 유역의 석유등의 자원확보가 더 큰 이유라고도 한다.

* 체첸족과 잉구슈족은 모두 이슬람교도이며, 체첸으로는 러시아의 석유 파이프가 지난다.

체첸은 자원뿐 아니라 지역적인 요충지이며 정교회중심의 러시아로서는 이슬람교의 저지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91년 11월  러시아 남서부 카프카스 지방에 위치해 있는 체체니아와 잉구셰티아(체첸-잉구시)에서 두다예프(구소련 공군 장군 출신)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두다예프는 이어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

 이에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연방의 붕괴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파급을 우려해 체첸에 군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의회의 반대로 인해 3일만에 군대를 철수시킨다.

 

1992년 6월 러시아 최고회의가 잉구셰티아를 러시아 쪽에 끌어들이기 위해 잉구셰티아 공화국 수립을 선언. 체체니아와 잉구셰티아는 2개의 공화국으로 분할.

 

1994년 7월 친러정권을 위한 반두다예프세력이 집결해 잠정평의회를 구성

8월부터 무장 투쟁을 선언해 10월과 11월에는 수도 그로즈니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러시아는 공개적인 지원이나 대대적인 원조는 피한채 간접적인 지원을 했으며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회피했었다.

 

제 1차 체첸 전쟁, 1994~1997

1994년 12월 잠정평의회의 요청으로 러시아군이 체첸을 침공하면서 전면전에 돌입한다.

1995년 5월 수도 그로즈니를 제압.

 장비와 화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러시아군이었으나 그로즈니 함락에는 한 달 정도가 걸렸다. 기갑부대를 시가지에 전진시켰다가 RPG 집중사격 전술과 저격수들에 피해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수도를 점령단한 후에도 체첸 병사들은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어 게릴자전을 펼치며 항전을 계속한다.

1996년 4월 두다예프 암살.

1996년 5월 양측을 합쳐 4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쟁이 장기화 되자 그에 대한 부담과 여론 악화로 양측은 협상에 나서 정전 합의를 이뤄냄.

1996년 8월 안보회의 서기 레베드가 체첸문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 여러 차례 협상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 모스크바에서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의견을 보였다. 얼마후 레베드가 안보회의 서기직에서 해임된다.

1997년 5월 양측 정상은 신 평화조약을 체결.

 

1998년 4월 샤밀 바샤예프 체첸 반군 사령관. 회교원리주의 기반 다게스탄 반군과 연합. 다게스탄에 침입해 '체첸-다게스탄 공화국'의 건설을 공포. 러시아내에 회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

 

제 2차 체첸 전쟁, 1999~2000(또는 1999~ 진행중으로 보기도함)

1999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5차례나 연이은 폭발사고 발생.

 러시아는 체첸측의 테러로 결론짓고 체첸국경의 푸틴 총리(대통령 대행)의 명령에 따라 반군 거점지역에 공중폭격을 감행
2000년 2월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로즈니를 점령. 단계적 철군 발표.

- 기화폭탄을 먼저 사용한 후 군이 들어갔다고 함. 반군은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

2001년 8월 철군은 이루어지지 않음. 체첸반군이 러시아 헬리콥터 격추. 118명 사망.

2002년 9월 러시아. 체첸에 영구히 병력을 주둔할 것을 발표

2002년 10월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

2009년 4월 16일 10년간 체첸공화국에서 진행된 반테러 작전을 종결

*  러시아는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벌이자 이에 맞춰 '카프카즈지역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로부터 조국을 방어'한다는 논리로 체첸전을 묘사했다.

 

2009년 6월 잉구세티야 대통령 테러로 중상, 다게스탄 공화국 내무장관이 암살.

2009년 10월 23일 그로즈니 카디로프 대통령(친러시아)에 대한 자살 폭탄 미수 사건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태

2002년 10월 23일 모스크바 시내의 `돔 꿀뜨르이(문화의 집)' 극장에서 벌어진 인질극
 시내 극장에서 아르비 바라예프(반군 지도자)가 사흘간 700여명의 극장 관객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 사건. 인질극에 참여한 반군 여성들은 독립전쟁 희생자들의 부인들로 알려졌다(이때문에 희생된 반군의 부인으로 이루어진 검은 미망인이라는 조직이 있다고도 함). 전쟁 중단과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임산부,어린이등 200여명을 풀어준 후 인질극을 이어갔으나 러시아는 특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정체불명의 마취 가스를 이용한 구출 작전으로 반군 20명과 민간인을 포함해 140~170명이나 사망하면서 과잉진압의 여론이 자국 및 세계에서 쏟아졌다.

 

기타 체첸관련 테러사건(위키에서 발췌)

마스하도프 사망으로 1996년 조하르 두다예프,2004년 2월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임시대통령, 2004년 5월 아흐마드 카디로프 대통령 등 역대 체첸 지도자 4명이 모두 살해

2002년

체첸공화국 수도 그로즈니의 정부 청사 폭파 사건

2003년

체첸 공화국 북서부 행정 청사 폭파 사건

모스크바 야외 콘서트장 폭파 사건

2004년

모스크바 지하철 폭파 사건
그로즈니 독일 전승 기념식장을 폭파 사건(카디로프 대통령 사망)
인구시 공화국 내무성 등을 습격 사건
모스크바발 여객기 동시 폭파 사건
모스크바 지하철역 부근 폭파 사건
북쪽 오세치아 공화국 베스란 학교 점거 사건

2005년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 수도 날치크 동시 습격 사건

 

* 체첸 반군은 관련 사건 직후 범행에 대해 성명을 내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하고 세계의 이목이 사그라들 때 범행을 인정하는 성명을 냈다고 함.
이슬람 원리주의 과격파 세력과의 연계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최근 다시 세력을 확장한 탈레반 반군에 체첸 원리주의자도 합류한다는 이야기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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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은 소련으로부터 차별 대우와 박해를 받았다. 주민들은 반 러시아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는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편입되기전인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도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해 전쟁을 했었다.

 

체첸(=체체니아,Chechenia)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지역에 위치 수도는 그로즈니
인구 130만 명의 작은 나라로 러시아의 3대 유전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과 터키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해온 전략-지리적 요충지.

이슬람교를 주로 믿으며 소수가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체첸족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생활하며 잉구슈족과 매우 유사한 언어를 쓴다.

1859년 러시아에 병합.

- 20세기 초 민족말살정책으로 많은 체첸인들이 중동의 이슬람국가들로 강제이주

1920년 11월 체첸 자치주 설립
1934년 체첸 자치주와 잉구슈 자치주가 합쳐져 체첸잉구슈 자치주가 됨.
1936년 체첸잉구슈(=체체노잉구셰티야)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44년 독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체첸족과 잉구슈족이 중앙 아시아로 쫓겨나면서 자치공화국이 해체.
1957년 흐루시초프 시절 복권조치로 유배자들이 돌아오게 됐으며 자치공화국도 재설립.

2009년 현재 대통령은 람잔 카디로프이며 친 러시아 인물이다.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

1991년 독립 선언 이후의 '인정 되지 못한'국가.

체첸 반군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으며 반 러시아이므로 러시아 정교회를 믿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로 정통 체첸임을 내세운다.

러시아에 적대적이나 친러정책을 펴는 체첸 공화국과 대립하기도 한다.

 

잉구셰티야(Ingushetia)
러시아 연방 남서부에 있는 공화국.
남쪽으로 그루지야, 동쪽으로 체첸, 서쪽과 북쪽으로는 세베르나야오세티야와 접해 있다.
수도는 나즈란 시이.
1810년경 잉구슈족이 러시아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 여타 민족과는 달리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않음.
1924년 잉구셰티야 자치주가 설립.
1934년 체첸 자치주와 합병.
1936년 체첸잉구슈 자치공화국이 설립
1944년 2차 세계대전중 해체. 주민들은 독일에 협력한 죄로 기소되어 소련의 아시아 지역으로 추방.
1957년 공화국이 재수립. 추방자들도 귀환을 허가받음.

2009. 10. 21.

장미 전쟁

장미 전쟁 (薔薇戰爭, Wars of the Roses,1455~1485)
 랭커스터(Lancaster) 가문(붉은 장미 문장)과 요크(York) 가문(하얀 장미 문장)사이의 왕위 쟁탈전.
 두 가문의 문장이 장미 였기 떄문에 붙은 이름이다. 양쪽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주장.
 
1399년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차지
  랭커스터왕조는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했었으며 이로 인해
  헨리 6세 때 요크공 리처드가 랭커스터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1422년 헨리 5세가 죽은 뒤 헨리 6세가 계승.
 헨리 6세는 학구적인 왕으로 종교의식과 교육기관 설립(!440~1441, 이튼 고등학교,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관심을 쏟았고 정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신하들에게 맡겼다.
내정은 문란해졌고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지속된다.
1445년 프랑스 왕비의 조카인 앙주의 마거릿(또는 마가렛트)과 결혼
하지만 프랑스 내의 영국 소유지는 점점 줄어들었으며 그 입지마저도 위태로워진다.
1449년 서머싯 공작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보퍼트와 요크 공작 리처드가 권력 다툼을 벌인다.
1453년 헨리 6세가 정신이상 중세를 보이자 귀족 동맹은 리처드를 섭정으로 세운다.
1455년 건강을 회복한 헨리 6세가 마거릿 일파의 권위를 재확립. 마거릿은 리처드를 추방한다.

추방 당한 리처드가 다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1455년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5. 22)에서 요크 가문이 승리.
  4년간 휴전이 이루어진다.
1459년 내전이 다시 시작.
  요크 가문은 블로어히스(9. 23)에서 승리했으나 러드퍼드 다리(10. 12)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 이후 흩어지게 된다.
1460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프랑스에서 요크파 군대를 모아 돌아온 후 노샘프턴(7. 10)에서 랭커스터 군을 상대로 승리.
 헨리 6세를 사로잡아 그가 죽은 후 아들인 에드워드 대신 요크를 후계자로 하는 것으로 합의 한다.
 랭커스터 가문은 영국 북부에서 병력을 모아 웨이크필드(12월)에서 요크군을 기습해 리처드를 살해.
1461년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2. 17)에서 워릭의 요크군을 격파해 잡혀있던 헨리를 구출.
하지만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2. 2)에서 랭커스터군을 무찌르고 런던 탈환을 위해 진군해 랭카스터,마거릿보다 먼저 도착한다.
3월 4일 젊은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에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선포.
에드워드는 워릭과 마거릿을 추격해 타우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다. 헨리와 마거릿, 그의 아들은 스코틀랜드로 도망.


1469년 요크 가문내 워릭과 에드워드 4세의 분쟁으로 내전이 다시 시작.
  워릭과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북부에서 반란을 선동해 에지코트에서 에드워드를 포로로 잡기도했다.
1470년 에드워드가 다시 통치력을 회복하자 워릭과 클래런스는 프랑스로 도망.
  루이 11세와 적이었던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는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에드워드를 폐위하고 헨리 6세를 왕으로 복위시킨다.
  에드워드는 추종자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도망
1471년 부르고뉴인의 도움을 받은 에드워드는 영국으로 돌아와 바넛 전투등에서 워릭을 패퇴시킨다.
  마거릿은 웨이머스에 상륙했으나 워릭의 패퇴소식을 듣고 웨일스의 안전지대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투크스베리전투에서 패배 그녀의 군대는 전멸했으며 아들도 잃게된다.
  얼마 되지 않아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살해되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음.
 에드워드 4세는 1남 1녀가 있었으며 어린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오르고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공이 섭정한다.
하지만 글로스터는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서자라고 선언하며 폐위시키고 자신이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오른다.
배신 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요크 가문사람들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프랑스 루이 11세와 요크파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은 헨리 튜더는 보즈워스 평원 전투(8.22)에서 리처드를 죽이고 전쟁을 끝낸다.
헨리 튜더는 헨리7세로 왕위에 오른다.

 

장미 전쟁은 끝나고 강력한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된다.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지만 많은 귀족과 기사의 세력 싸움이 합쳐져 일어난것으로 본다.
본질적으로 귀족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귀족들은 백년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호위대를 거느렸고 약화된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남용했다.
귀족과 기사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영국은 절대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486년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하나로 만든다.
1487년 요크파의 반란을 제압했다. 이때를 장미전쟁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 내란 당시에는 '흰색 장미'의 요크가 문장만 있었다고한다. 후에 랭커스터가문이 붉은 장미 문장을 쓰자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함.
튜더로즈(Tudor Rose) 문양이 있다. 붉은 색과 하얀 색 장미가 함께 들어있는 장미 문양으로 랭커스터와 요크의 문장이 합쳐진 형태.
** 축구 EPL(영국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랭커셔주,붉은 유니폼)와 리즈유나이티드(요크셔주,하얀 유니폼)간의 경기를 일컫는 말로도 쓰임.

2009. 10. 20.

마케도니아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Macedonian Wars, BC 215~148)
 로마는 그리스 문제에 영향력을 높이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된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15~205)
- 제2차 포에니 전쟁(로마 대 카르타고)중에 일어났다.
-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이웃한 일리리아 지방에 있는 로마의 보호국들을 공격
- BC 215년. 로마의 적인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
- 로마군은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임.
- BC 205년. 필리포스에게 유리한 조건의 포이니케 평화조약.
- 마케도니아는 일리리아 지방을 차지하게 된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
- 마케도니아가 에게해의 그리스 도시국가(로도스, 페르가몬등)들을 약탈.
- 로마 원로원이 그리스 침략 중단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쟁 돌입.
- BC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의 연합군에게 패배
- 마케도니아 해군은 해체,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지불, 마케도니아 이외의 영토 포기.
- 로마. 그리스에 보호령을 설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BC 171~168)
- 필리포스의 아들 페르세우스(BC 179~168 재위)가 여러 그리스 도시국들과 동맹을 맺음
- 로마가 이에대해 반감을 가지게 됨으로써 전쟁으로 발전.
- 피드나 전투.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로마군이 페르세우스의 군대를 대파
- 페르세우스는 사슬에 묶여 로마로 호송.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BC 149~148)
-  마케도니아를 4개의 자치 공화국으로 나누고 조공을 바치게 하자 혼란을 초래.
-  BC 152년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안드리스코스가 왕국 재건을 시도.
-  로마의 집정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
-  마케도니아는 BC 148년 로마 제국 최초의 속주가 됨.

 

피드나 전투(Battle of Pydna,BC 168. 6. 22)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루키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페르세우스 왕의 마케도니아 군을 엘페우스 강(마브롤롱고스 강) 연안에 있는 난공 불락의 진지에서 끌어내어 피드나(Pydna) 남쪽 평야에 있는 취약한 지점에 진을 쳤다.
땅의  기복이 심한 지역으로 방진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군은 대열에 혼란이 발생한다. 로마 군단과의 백병전에서 마케도니아 창병은 짧은 칼을 지닌 로마군에게 밀리게 된다.
 마케도니아 좌익(트라키아인과 경무장한 부대로 이루어짐)이 로마 동맹국에 패배하게 되면서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페르세우스는 전투후 도망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로마로 끌려간다.
로마는 마케도니아 왕정 대신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 했으나 마케도니아인의 혼란을 가중시켜 4차 전쟁의 빌미가 된다.

미트라다테스 전쟁

미트라다테스 전쟁(Mithradates, BC 88~65)
폰투스의 왕인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는 주변 소국을 흡수하며 세력을 넓혀나가는 정책을 벌였다.
이때 로마의 조정을 받는 니코메데스 4세(비티니아 왕)와의 대립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해 로마와 직접적인 마찰을 빚게 된다.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방해를 받은 미트라다테스 왕은 그리스와 로마의 전쟁이라는 구도로 몰고가며 소아시아에서 로마를 몰아내려 한다.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BC 88~84)
  - 니코메데스 4세가 폰투스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
  - 로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총사령관으로 소아시아에 파견
  - 그리스인들은 초기에 미트라다테스의 편이었으나 술라가 승기를 잡자 로마편으로 가세.
  - 폰투스. 아나톨리아의 로마인 8만명을 학살(BC 88)
  - 다르다노스 조약으로 전쟁 종결.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문제로 조약후 급히 로마로 돌아감.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BC 83~82)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미트라다테스가 재무장을 준비한다'는 구실로 침공.
  - 폰투스가 로마를 격퇴

 

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BC 75~65)
-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다 전면전으로 확대.
- BC 74년 미트라다테스가 비티니아 속주 침략
- 폰투스. 칼케돈에서 로마의 집정관 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패퇴시킴.
- 로마. 루쿨루스가 킬리키아 총독에 입명.
- BC 73년. 루쿨루스에 의해 미트라다테스 패배.
- BC 72년. 미트라다테스. 동맹국인 아르메니아(티그라네스 2세 치하. 그는 미트라다테스의 사위이기도 함)로 피신
- 루쿨루스. 티그라노케르타(BC 69), 아르타크사타(BC68)에서 승리를 거두며 아르메니아로 추격
- 루쿨쿠스는 부대 내부의 반란 BC 66년 폼페이우스로 교체
- 폼페이우스가 폰투스와 아르메니아군을 완패시킴.

 

미트라다테스 6세
'미트라 신의 선물' 이라는 의미. 아나톨리아 북부의 폰투스 왕국의 왕. 미트라다테스 대왕이라고도 하며 미트라다테스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 왕.
미트라다테스 5세가 죽고 어머니인 게스파이피리스가 왕국을 통치했다. 후일 그는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방해되는 형제들을 죽여 통치력을 강화한다. 주변 도시국가를 흡수하며 왕국을 넓히는데 주력했으나 로마와의 마찰로 인해 '미트라다테스 전쟁'에 휩싸인다.
3차 전쟁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종결된 후 퇴각을 거듭. BC 64년 미트라다테스는 킴메리 보스포루스 반도에 있는 판티카파이움에서 병력을 모았다. 도나우 갈을 건너 이탈리아 침공하자는 구상이었으나 아들 파르나케스 2세의 반란에 의해 무산되고 도망쳤다.
 마지막 반격 의도가 무산되자 실의에 빠져 독약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시체는 폼페이우스에게 보내졌으며 폼페이우스는 그를 폰투스의 수도 시노페의 왕실묘지에 매장했다.

 

* Anatolia :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터키의 넓은 고원 지대
* Pontus :  BC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복 후에 건국. 초기 수도는 아마세이아(아마시아:Amaseia, Amasia,Amasya)였으나 BC 193년 시노페(시노프:Sinope,Sinop)로 옮겨진다.

2009. 10. 17.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os,BC 431~404)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칩입을 우려해 BC 478년부터 델로스 동맹을 맺는다. 이때 스파르타 역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그리스지역에서 몰아낸 이후 아테네는 동지중해의 강자로서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또한 이 동맹을 이용해 패권을 확장해 나갔으며 이런 행위들은 점차 스파르타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스파르타는 이에 반발하며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끌고 전쟁을 벌인다.

 

간단하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패권다툼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아테네

해군 중심 || 민주정치

- 민주정치 :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정치를 운용한다.

델로스 동맹(Delos)

- 아테네를 중심으로 에게 해 일대의 여러 나라들과 맺은 해상 동맹. 델로스 섬에 본부를 둠.

 

스파르타

육군 중심 || 과두정치

- 과두정치 : 적은 수의 우두머리가 국가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여 행하는 독재적인 정치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os)

-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군사 동맹.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외의 도시들이 참여.

 

BC 460~446 아테네와 코린트의 분쟁 -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도 함.

     스파르타가 코린트를 돕기도 함. 30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

 

BC 431~421 아르키다모스(Archidamos) 전쟁  - 아르키다모스 2세가 아테네를 침공

BC 421~415 휴전기 - 니키아스 평화조약

BC 415~404 아테네가 시칠리아 내전에 원정군을 보내면서 큰전쟁으로 확대

 

  아테네가 전략적 요충에 위치한 코르키라(코린트의 식민지)와 동맹을 맺자 펠레폰네소스 동맹은 이를 비난하며 양보를 요구했으나 아테네는 이에 대한 양보를 거부한다.

 실질적인 전쟁은  전쟁에 반대했던 아르키다모스 2세가 어쩔 수 없이 동맹군을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하면서 시작된다.

 아테네는 주로 도시(성곽)을 중심으로 한 방어와 함께 해군으로 적의 해안과 병력을 괴롭혔다. 아테네는 전염병으로 힘이 약화되긴했으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퇴했다.

10여년간의 전쟁은 서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으며 전쟁에 지친 양동맹은 조약을 맺는다.

 

그 6년 후 전쟁은 재개 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로부터 해군을 지원받아 아테네 해군에 대항했고 전통적으로 아테네보다 강력한 중보병으로 아테네를 공략한다.

결국 아이고스포타미 전투(Battle of Aegospotami)를 끝으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나게 된다.

 

한동안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패자로서 자리잡는다.

*  BC 5세기 경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씀.

 

- 더 자세한 사항은

:: 네이트 백과사전 자료 ::

:: 위키자료 ::

2009. 10. 14.

30년 전쟁

1618~1648 三十年戰爭, Thirty Years' War

 

 프로테스탄스(Protestants,신교도)와 카톨릭(Catholic,구교도) 세력간의 전쟁.

 

합스부르크가의 구교에 의한 독일 통일 정책에 대하여 신교의 대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시초가 되어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게된다.

 

 큰 틀로는 프로테스탄스와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이지만 전쟁기 동안 각국의 이해관계(왕조간, 적대국간의...)가 얽혀 카톨릭, 프로테스탄스 국가 사이에도  동맹이 이루어 지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띈다

 

 주요 전장은 독일 전역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전쟁에 의한 학살,질병,약탈,방화,강간,살인등 민간인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프랑스였다. 국경을 넓혔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구스타프 아돌프(Gustavs II)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1611년 17세에 즉위)은 1630년 프로테스탄트의 보호를 위해 출정한다. 용병과 모병한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총병,창병,기병,포병등으로 구성되었다. 통일된 군복과 계급 군장을 달았다.

1621년 9월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에 대항해 벌어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다.

그가 죽은 1632년 이후로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유지했다.

 -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불림. 최초의 국민군 창설

 - 총병과 창병 비율을 1:3에서 1:1로 끌어올림. 총병과 창병의 복합 전술

 

베스트팔렌 조약(Westfalen,웨스트팔리아)
 1648년에 독일 북부 베스트팔렌 지방의 오스나브뤼크에서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의 여러 나라가 체결한 조약. 네덜란드,스위스가 독립하였으며, 독일의 신,구 양교는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 카톨릭 = 기독교,구교,천주교

   그리스도의 정통 교의(敎義)를 믿는 종교.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와 그로부터 독립한 그리스 정교로 나눈다.

- 구교 =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

- 신교 = 프로테스탄스(개신교)

 

2009. 10. 12.

레판토 해전

 1571년 10월 7일.

 

 그리스의 레판토(Lepanto) 항구 앞바다에서 기독교 연합(신성연합,크리스트 연합)과 오스만 제국이 벌인 16세기 최대의 해전.

 

 (서양)최초의 화력전이자 갤리선 시대 최후의 전투로 불리우기도 한다.

 

기독교 함대

에스파냐, 베네치아, 로마 교황(비우스 5세),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의 연합

에스파냐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했다.

주요 세력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에스파냐.

(갤리 208, 갈리아스 6, 약 8만 4천명)

- 화승총, 머스킷병. 석궁수

- 갈레아스(갈레아차)

  갑판위에 포좌를 배치한 육중한ㅡ일반 갤리의 2배크기ㅡ갤리함. 30문의 대포를 배치.

- 일반갤리선 : 뱃머리 5문의 대포

 

투르크함대

알리 파샤 지휘.

주요 세력은 이슬람 해적.

(갤리(대) 210, 갤리(소) 63, 약 8만 8천)

- 복합궁수 위주

- 일반갤리선 : 뱃머리 3문의 대포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 후 오스만 제국은 팽창 위주의 정책을 펼쳐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럽을 향해 서진하고 또한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1570년 베네치아의 소유인 키프로스섬을 오스만 투르크가 공격하자 베네치아는 로마,에스파냐등에 도움을 요청. 교황이 상징적으로 중심에선 연합군 결성해 전투를 벌이게 된다.

 

 당시에는 상대 함선에 올라가 지상전처럼 싸우는 형태(Boarding:접현전)과 충각을 이용한 충돌 공격(Ramming)등이였으나 이 전투에서는 대포(함포)에 의한 공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대규모 함대전인만큼 전통적인 방식의 교전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갈레아스의 함포가 위력적ㅡ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ㅡ으로 작용 했다.

 

 전투는 화력과 기술적 우위를 지닌 기독교측의 승리로 결판 났으며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과는 달리 각국이 얻은 실질적인 이익은 거의 없었다. 대신 강력한 함대를 갖춘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유럽인들의 사기를 높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유럽은 투르크가 새로운 함대를 구축하기 전까지 아주 한시적으로 지중해를 장악한다.

 

- 해전에 있어 레판토 전투는 갤리선과 범선, 접현전과 화력전의 경계로 삼기도 한다.

- 이 해전에서 사용된 대포는 소형이었으며 인명 살상용정도 였다고도 함.

- 영국은 헨리 8세 제위시절 배위에 함포를 장착했으며 이후 갑판아래에 함포를 넣었다.

  1513년경 매리 로즈호 와 그레이트 해리호를 건조.

 

* boarding : 널판장(대기), 판자울 = 갈고리등을 이용해 적전과의 간격을 좁힌후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 직접 칼이나 무기를 들고 벌이는 바다위의 지상전. 선상에 기어올라가거나 줄을 이용해 적선에 뛰어드는 것등 모두 포함한다.

 

볼만한 자료

-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3부 레판토 해전.

2009. 10. 9.

트로이 전쟁

일리아드(Iliad = 일리아스 Ilias)

'일리온의(에 대한) 노래(시)'라는 뜻으로 일리온은 트로이의 왕성이름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또는 호머. BC 9 ~ 8세기경)가 지었다고 하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영웅 서사시.

 10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동안 일어난 사건을 마지막 51일 동안의 사건으로 정리해 노래한 것으로, 모두 1만 5693행으로 되어 있다.(일부에서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총 24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우스등 신이 등장하여 실제 이야기가 아닌 전설로만 치부되기도 했으나 트로이 발견 이 후 실제 했던 일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트로이,트로이아(Troy,Troia,Troja_라틴어)

'일리아드','오딧세이'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무대. 호메로스는 작품에서 일리오스,일리움(Ilium)이라고 적기도 했다.

 1871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 발굴에 성공하면서 실제 했었음이 밝혀졌다.소아시아 반도 서쪽, 다르다넬스 해협에 가까운 히사를리크(Hisarlik/궁전이라는 뜻/현재의 터키 서부 해안가) 언덕에 있던 고대 도시 국가.

 슐레이만은 발굴을 거듭해 도시아래 또다른 도시와 거주지를 포함 총 9개의 지층을 찾았다. 뒤이어 미케네왕의 무덤을 발굴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찾던 트로이 전쟁 시대의 성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의 사후에 다른 발굴자들에 의해 6~7번째 층에서 트로이 전쟁 시대의 성과 도시를 발견했다.(현재 7기에 해당하는 곳을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로 추정하고 있다.)

 

* 영국의 프랭크 캘버트 역시 히사를리크 언덕을 지목했다고 한다. 슐리만이 그의 주장을 따랐다는 설도 있다. 또는 슐리만이 직접 그리스 지역을 돌아다니며 홀로 찾았다고도 한다.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헬레나를 트로이의 파리스가 납치하면서 시작된다.(일부에서는 헬레나 역시 마음에 있어 야반도주했다고도 한다.)

 많은 영웅들과 신들이 등장하며 특히 아가멤논,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오딧세우스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영웅 중심의 서술을 보여준다.

 결론부에서는 전세가 트로이측에 유리하게 흘러가자 그리스군은 목마를 두고 철수하고 ,트로이가 승리의 상징으로 목마를 성 안에 들여 놓는다. 그날 밤, 목마 속에서 나온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병사들에 의해 트로이는 완전히 정복된다.

 

 일리아드에는 다양한 신들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영웅인 아킬레스, 헥토르등이 전투와 성곽 포위공격등에 대해 나온다. 전체적으로 신화와 교묘히 섞여있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적인 내용인지 구분하긱 힘들다.

 

:: 위키 - 일리아스 ::

2009. 10. 8.

백년전쟁

Hundred Years' War, 1337~1453

百年戰爭

 

 거의 100년간 간헐적으로 거듭된 영-불전쟁. 기옌과 플랑드르를 둘러싼 이해 관계때문에 발생한 싸움으로 영국이 프랑스에 침입하면서 발발. 프랑스 왕위권 계승문제가 겹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띈 전쟁이다.

유럽 국가주의의 시초가 된 전쟁이라고도 하다.

 

 초기 크레시,푸아티에 전투등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궁지에 몰렸으나 샤를 5세에 의해 안정화 되었다. 샤를6세때 내부 혼란으로 헨리 5세에게 아쟁쿠르에서 패하고 그의 아들 헨리6세가 양국의 왕이 된다. 샤를 7세때 잔다르크등의 활약으로 전환점을 이뤄내 칼레 이외 지역의 영국군을 몰아내며 전쟁이 끝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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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년 슬로이스 해전(6. 23.)에서 영국이 승리 했으나 지상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는 크게 크레시 전투까지 이어진다.
몇년간의 휴전기 이후 브르타뉴 계승전쟁이 불거진다.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1345년 카엔 전투(7. 26.), 블랑셰타크 전투(8. 24.)등 영국 승리.

 

1346년 8.26. 크레시(Crecy) 전투 - 에드워드 3세 대 필리프 6세

 영국군과 프랑스 크레시 숲에서의 전투. 에드워드 3세는 궁병과 중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코탕탱(Cotentin)반도로 상륙시켜 영국군이 주변지를 약탈하며 남하하자 이에 대응해 필리프 6세는 중기병 중심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프랑스군의 출진을 안 영국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부 프랑스 병력과 전투를 벌이며 크레시에 집결한다. 프랑스군은 신속히 북상해 전투 당일 정오에 크레시에 도착한다.

 

 영국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장궁병 중심으로 언덕 경사면에 역 V자로 포진한다. 기병들도 내리게해 보병대를 구성. 양익의 장궁병 전방에는 기병의 진출을 막는 장애물을 설치했다.

 프랑스는 대군이었으나 지휘체계가 제각각이었고 장기간 이동후 휴식도 취하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제노바 석궁병을 앞에 중기병을 뒤에 놓았다.

 

전투는 영국식 장궁(English Longbow)이 프랑스 중기병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석궁보다 장궁의 효율이 좋았을뿐 아니라 행군동안 비에 맞은 석궁이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장시간 행군을 하고 정리도 안된 상태에서 바로 전투를 벌인 탓에 석궁병 본래의 공격력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패배를 직감하고 도망치던 석궁병들은 자기편 중기병들에게 사살 당했다.

 프랑스 중기병은 자존심과 기사로서의 우월감을 뽐내며 줄을 맞춰 돌진했으나 영국군이 설치한 장애물과 경사,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된 땅등에 의해 별다른 공격을 하지 못했다.

영국 장궁병과 보병들은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프랑스 귀족의 1/3이

 

전투가 끝나고 영국은 프랑스 부상병들중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보이는 사람은 모두 죽였으며 포로중에도 몸값이 되는 자만 골라내고 즉결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1356.9.17~9.19  푸아티에(Poitiers) 전투 - 에드워드 흑태자 대 장 2세
  9월 17일에 접전이 벌어졌으나 다음날 9월 18일 하루 동안 휴전을 한다. 이 하루 동안 영국군은 푸아티에 남쪽 늪지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흑태자는 에드워드3세의 아들로 크레시 전투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크레시와 비슷하게 기병이 힘을 못쓰며서 패퇴당한다.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프랑스에 불리한 브레티니 조약과 칼레 조약(1360)에 동의하게 된다.

 

1415년 아쟁쿠르(Agincourt) 전투 - 헨리 5세

  궁병 및 보병 위주의 영국군이 중기병위주의 프랑스군 섬멸. 전투 전에 헨리 5세가 성 그리스핀 축일 연설(St. Crispin's Day Speech)을 했다고하는데 이 연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함.

 

1428.10~1429.5 오를레앙 포위전

 영국군이 오를레앙 요새를 포위해 벌어진 전투. 영국이 유리했으나 17세의 소녀 잔다르크가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eans)

잔다르크(Jeanne d'Arc, 1412-31)

아르크의 요안나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주로 깃발을 들고 말 위에 올라탄 여기사로 그려진다.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중무장을 한 채 군을 이끌었다. 남자가 많은 군대에서 활동하기 편하면서 정조를 지키기위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무기를 들기는 했으나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깃발을 들고 독려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고 한다.

백년전쟁은 잔다르크의 등장 이 후 프랑스가 우세하게 진행되었다.

 

'전보, 라디오, 프랑스, 걸스카우트, 순교자, 포로, 여군, 강간 피해자, 군인'의 수호 성인이라고 하며 1차 대전등에서 사기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활동(propaganda)에 사용되기도 했다.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태어남
1424년 계시를 받음.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
- 영국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샤를 7세)을 왕위에 올리라는 내용
1428년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백작을 찾아 샤를 대공이 있는 시농 성으로 갈 수 있도록 부탁.
- 주변의 도움과 열성적인 설득끝에 허락을 받고 시농 성으로 가 샤를대공을 알현.
- 푸아티에에서 프랑스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도덕성 심사를 받아 프랑스군으로 참여를 허가받음.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 요새에 도착.
 - 오를레앙 백작은 탐탁치 않게 생각해 작전에서 제외시켰으나 홀로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지지를 받았고 뒤이어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 뛰어든다.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오를레앙에서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군에게 두터운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자 하느님이 보낸 성녀로서 알려진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에서 요새를 방어하다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힘.

-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프랑스에 몸값을 제시했다. 그 사이 잔 다르크는 여러 번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에 영국에 넘긴다.
-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으로 압송.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다. 전적으로 영국에 유리하게 재판진행되었고 수녀원이 아닌 병사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수감한다.
1431년 5월 29일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
1431년 5월 30일 군중들 앞에서 화형.

- 유골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3번에 걸쳐 태워 재는 센 강에 버려졌다.

1456년 7월 7일

- 프랑스. 샤를 7세가 명예회복재판을 열어 잔 다르크가 무죄임을 밝혔다.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잔 다르크를 성녀로 시성. 축일은 5월 30일.

 

* 라퓌셀(La Pucelle,처녀)

잔 다르크를 잔 라퓌셀(Jeanne La Pucelle)이라고도 표현함.

 후일 잔 다르크를 기려 그녀가 태어난 작은 마을의 이름인 동레미에 라퓌셀이 추가되어 동레미라퓌셀이 됨.

 

- 잔 다르크가 실질적으로 뛰어난 전술가이자 군인이라는 설과 단지 사기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는 설이 있다.

- 그녀가 보았다는 계시는 간질에 의한 환상과 환청이라는 의견도 있음.

- 샤를 7세 혹은 프랑스 지배층 일부에서 그녀의 신성성과 대중적인 인기,힘을 우려해 그녀가 영국으로 가도록 혹은 갈때까지 방치되도록 했다고 함.

2009. 10. 7.

포에니 전쟁

Punic(poeni) War 또는 Carthaginian War

 로마와 카르타고(Carthage,현재의 튀니지)가 지중해 지배권을 두고 다툰 세번에 걸친 전쟁.

포에니는 '페니키아인 의~(Poenicus)'에서 왔다. 페니키아인이 814년경 북아프리카에 세운 식민지가 바로 도시국가 카르타고였다.

 

제1차 포에니 전쟁(First Punic War, BC 264 ~ 241)

  로마와 카르타고가 코르시카(Corsica)와 시칠리아(Sicilia) 두 섬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로마는 지중해의 이권을 얻으려했으며 전통적인 해운국이자 서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한 카르타고와 결국 충돌하게 된다.

 

BC 264년 메사나와 시라쿠사 간 분쟁에 끼어들어 카르타고 시칠리아 섬에 주둔. 로마가 메시나를 공격해 카르타고군 철수.
BC 260년 로마 함대가 아크라가스등 시칠리아 섬 일부 장악하고 코르시카 섬으로 가는 길을 뚫어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를 격퇴시킨다.

BC 256년 로마는 아프리카 대륙에 발판을 마련하고 협상에서 가혹한 협상조건을 내걸음.
BC 255년 기병대와 코끼리를 중심으로 새 부대를 조직한 카르타고가 로마 군대를 몰아냈다.
BC 254년 ~ 241년까지 소강상태
BC 241년 아이가테스해전. 200대의 전함으로 무장한 로마군은 해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시칠리아 섬에 있던 카르타고 요새를 파괴.
BC 240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아이올리아(리파리) 제도를 로마에 넘겨주고 배상금을 내는 것에 합의하고 항복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BC 218 ~ 201)

  로마는 1차 포에니전의 승리 이 후 패자인 카르타고에 대해 가혹하게 대했으며 합의보다 많은 전쟁 배상금을 강요했다. 또한 코르시카와 그 남쪽의 사르데냐(Sardegna)섬을 빼앗기까지 한다.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와 아들 한니발, 사위 하스드루발의 지휘하에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BC 219년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에 있던 사군툼(Saguntum,현재 지명 사쿤토)을 함락시킨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로마는 해상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이에 이베리아 반도((히스파니아~갈리아)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을 하게 된다.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을 막고 있는 와중에도 식량원중 하나인 사르데냐와 시칠리아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BC 218년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을 이끌고 포 강가에 있는 평야에 도착. 로마군이 방어에 나섰으나 격퇴되었다.

BC 217년 한니발은 갈리아인들의 증원을 받아 남쪽으로 이동한다. 로마를 공격하는 대신 시민들의 반란을 원해 주변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BC 216년 칸나이(칸나에)전투에서 로마군을 포위 섬멸한다.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방어 전략으로 일관했으며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BC 211년 로마가 카푸아 시를 되찾는다.

BC 207년 리구리아와 갈리아의 군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하스드루발이 알프스를 넘어 한니발과 합류했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메타우로스 강에서 남부 로마군 사령관 가이우스 네로의 로마군에 패한다.

BC 206년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대 스키피오)가 일리파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낸다.

BC 204년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원정.

BC 203년 한니발 본국으로 소환된다.

BC 202년 자마 전투. 한니발과 스키피오로 대표되는 전투로 카르타고를 지원했던 강력한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스키피오가 승리했다.지중해의 섬과 히스파니아, 해군을 로마에 양도했고 전쟁 배상금을 냈다.

 

제3차 포에니 전쟁(Third  Punic War,BC 149 ∼146)

 1,2차 전쟁으로 활력을 잃은 카르타고지만 상업적으로는 영향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BC 150년 누미디아가 카르타고를 침공하자 무력으로 이에 대응했다. 하지만 로마와의 조약을 어긴것이 되어 로마군의 간섭을 받게된다.
로마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던 카르타고였으나 상업적 터전인 바다에서 먼 내륙으로 거주지를 옮기려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은 2년간 지속되었다.
BC 147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가 결국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2년에 걸친 포위공격에 도시인구 25만 여명에서 단 5만 여명만이 살아남았고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도시는 철저히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렸다.

 

카르타고는 역사상에서 사라졌으며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 2년에 걸친 공성전/포위전에서 카르타고는 매우 격렬히 저항 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했다고도 하는데 판타지물등에서 좋은 소재로 쓰일수도 있을 듯 싶다.

2009. 10. 5.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 BC 492~448)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BC 521~486)가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전쟁.

 그리스의 지원하에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인들이 잦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근본적으로 막기위해서 그리스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스 원정만을 들어 BC 492~479로 한정하기도 한다.

 

그리스측(아테네,스파르타 : 보병) :: 페르시아측(보병,궁병,기병)

 

 BC 492년 트리키아,마케도니아 공략. 1차원정 시도. 태풍으로 궤멸.
 BC 491~490 1차침공(2차원정). 마라톤전투.
 BC 480년 2차 침공(3차원정). 테르모필레전투, 살라미스 해전

 BC 479년 플라타이아이, 미칼레전투 - 페르시아 그리스에서 철수

 

마라톤 전투(Marathon,BC 490)
 대규모 해군을 조직 에게해를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손쉽게 상륙하여 에레토리아를 공략하고 주병력을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 해안에 상륙시킨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종교적인 행사를 이유로 늦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스파르타가 지원할 때까지 방어하는것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나 밀티아데스가 공격을 주장.결국 시민들을 설득시켜 시민병과 함께 마라톤으로 향한다.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에 주둔한 병사외에 일부를 배에 태워 아테네를 향해 보낸 상태였다. 마라톤으로부터의 공격과 아테네 상륙부대의 협공을 노린 것이었다. 밀티아데스는 빠른 공격과 재빠른 퇴각이 아테네를 살릴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군의 방진 대형에 맞서 양익을 강화시킨 대형으로 전진했다. 중심부는 속도를 줄이고 양쪽 측면은 속도를 높여 결과적으로 중심부는 고전을 하고 있었으나 강력한 양측으로 뚫고들어가 페르시아 군을 포위했고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군은 기민한 아테네군의 공격에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은 승리를 알리는 전령(이름은 페이디피데스)을 먼저보내고 빠른 속도로 회군해 아테네로 돌아왔다.배를 통해 공격하려던 페르시아 군대는 헤라클레스 신전을 방어중인이 병력들을 보고 승패가 갈린 것을 알게되어 회군했다

 

* 이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사자가 아테네까지 달려간 데서 마라톤 경주가 생겨나게 된다.

현재 마라톤 지정 거리는 42.195Km지만 당시 실제 달린 거리는 이에 못미친다고 한다.

 

테르모필레 전투(Thermopylae, BC 480) 테르모필라이/테르모퓔라이등...
 특히 레오니다스를 포함한 스파르타의 300명의 정예병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리스 중부 라미아의 남쪽에 있던 길. 아테네에서 테살리아로 통하던 좁고 험한 길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7000여명의 보병을 이끌고 약 7일간 페르시아군을 방어한 곳이다. 아르테미시온과 함께 방어선을 펼쳤다. 실제 전투는 4일정도 벌여졌다고 하며 좁은 길을 막아 페르시아 대군의 진격을 늦춘 전투.

 결국 그리스인 배신자에 의해 샛길로 돌아온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와 그의 병사들은 모두 전멸 당하게된다. 페르시아군은 이후 아테네로 진격해 시가지와 신전을 불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테로모필레 전투는 육지에서의 페르시아 공격을 어느정도 늦췄으며 일부에서는 아르테미시온 함대가 퇴각하는데 간접적인 도움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살라미스 해전(Salamis,BC 480) 세계(유럽) 3대 해전의 하나.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3차 침공을 한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침공 이전부터 막강한 페르시아 해군에 대항하기위해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3단 노선(Trireme)을 건조했다. 숫자는 페르시아군에 비해 적은 숫자만이 확보되었으나 질적으로는 뛰어난 함선이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페르시아군은 재해와 전투로 인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여전히 다수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와 아티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군을 유인했다. 크세르크스는 이미 원정목표를 달성한 상태였으나 승기를 잡은 이상 아테네 해군을 섬멸하는것도 좋은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대규모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모여들었다.

 아테네는 좁은 해협에서 대형이 흐트러진 페르시아를 상대로 빠른 속도와 충각을 이용해 치고받았다. 더구나 폭풍까지 불어 우왕좌왕하던 페르시아군은 400여척에 이르는 배가 침몰되거나 포획되었고 아테네 함대는 40여척을 잃었다. 이 해전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을 구했을 뿐아니라 지중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 역사 기록상 최초의 대해전.

 

 전쟁 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해진 도시국가는 아테네였다. 아테네는 에게해(Aegean Se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중심 국가로서 주변 국가들과 델로스 동맹(Delos,BC 478)을 맺었다. 델로스 동맹은 해상 동맹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아테네는 도시국가이자 그리스 문명의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했다.

2009. 9. 29.

십자군 전쟁

십자군(crusade) 전쟁 

십자군 원정, 십자군 운동등으로도 불림.

 

 1096년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그리스도교 중심의 군대가 예루살렘 및 팔레스타인의 성지 탈환/성지 수호을 목적으로 행한 전쟁. 서양의 시각으로는 성전이었으나 그에 맞서는 무슬림들에게는 침략 전쟁이었다. 사자왕 리처드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096~1099 1차. 분열된 이슬람 패배.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십자군 국가들 세워짐.

  1147~1149 2차.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이 공존. 이슬람의 반격으로 2차 원정군 패배.

  1189~1192 3차.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 이 후. 리처드1세 중심. 살라딘과 휴전.

  1202~1204 4차. 베네치아의 농간에 의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 점령. 라틴제국 건국

  1217~1221 5차  이슬람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 실패. 프레스터 존 전설 회자 됨.

  1228~1229 6차. 내란중인 이슬람과 협상으로 전투없이 예루살렘 통치권 이양 받음.

      - 1939년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 점령. 몇몇 원정군이 있었으나 전투없이 회군.

  1248~1254 7차. 1244년 예루살렘 공격에 대한 원정. 실패.

  1270         8차. 7차를 이끌었던 루이 9세가 출병했으나 병사. 실패.

 

  1271~1291년 사이에 기독교 국가들은 대부분 함락당했다. 1291년에는 마지막 도시인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마무리 된다. 이 후 15세기까지 십자군 원정은 있었던 듯하지만 예루살렘 탈환에 대한 것은 없는 듯하다.

 

 아랍 세계는 유럽인의 침략에 대응하기 보다는 내분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물론 십자군 역시 상륙과 함께 이국의 정취에 팔려 본분(?)을 소홀히 했으며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약탈만을 일삼기도 했다. 십자군 도시는 생겼으나 이들도 유럽의 동료만을 위해 싸우거나 편의를 봐준것이 아니었으며 이해관계에 따라 아랍인들과도 동맹을 맺거나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했다.

 

 십자군 기사(crusaders,십자군 전사)들은 주로 십자가 기장을 달았다. 유명한 기사단들이 나왔는데 이런 기사단들에 의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으며 유럽사회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이야기들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시대배경은 많은 소설에 차용되었으며 기사단에서 비밀결사로의 발전 혹은 그들이 숨겨놓은 보물이나 '성배'이야기까지 다양하게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 1096 군중 십자군, 1207 알비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함.

** 프레스터 존 : 머나먼 동방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왕국에서 프레스터 존이라는 인물이 대규모 원군을 이끌고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소문. 하나의 전설로 굳어져 십자군 사이에 퍼진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것이 '몽골'의 칭기즈칸과 그의 부대를 말한다고 한다.

 

참고용 서적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이야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관련 추천 게임

  어쌔신 크리드(Assassin Creed)

 

:: 위키-십자군 전쟁 ::

2009. 9. 27.

[개념] 세기,기원전,서기

[1] 세기, 센츄리

세기(世紀)는 100년 단위로 기간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보통 century의 약자로 C를 붙이기도 한다.

예 : 14세기 = 14c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09년은 21세기.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2000을 100으로 나눈다음 1을 더한 수로 인식하면 된다.

(2001년~2100년까지를 말한다. 정확하게는 2000년은 21세기가아닌 20세기)

예 : 14c = 1301~1400

 

기원전 240년이라면 BC 3세기에 해당한다.

즉 BC 300~BC 201 이 사이를 기원전 3세기로 칭한다.

 

[2] 기원전과 기원후

기원전 BC = B.C(before Christ) =  BCE(before Common Era)
기원후 AD = A.D(Anno Domini) =  CE(Common Era)

서력 기원(西曆紀元), 약칭 서기, 뒤의 BCD,CE는 종교적인 의미를 제외한 방식.
  BC와 AD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525년 부활절의 정확한 계산법을 알고 싶었던 교황 성 요한네스 1세의 요청으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후 예수의 탄생년도는 BC 4년경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기원력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BC 1년 이후에는 AD 1년이 따라오며 0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제작할 당시 서구에 0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BC2~AD1까지의 기간을 구한다면 1 - (-2+1) = 2.

 

우리는 쉽게 BC 300 ~ AD 300 식으로 사용한다.

(일부 책에서는 전 300 ~ (후) 300 식으로 기술되기도 한다)

서양등에서는 300 bc ~ 300 ad 로 사용한다.

기원전 끼리의 기간은 bc 하나만 쓰고 생략하기도 한다.

예) 300~400 bc = BC 300 ~ 400 = 전 300 ~ 400

 

기타 )--------------------------------------------------------------------

 서력은 율리우스력(Julius,구력,BC 46년.카이사르)과 그레고리력(Gregory,신력,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이 있으며 현재 전세계적으로 쓰는 것은 그레고리력이다.

 율리우스력은 카이사르 시기(BC 102~44) 이집트의 태양력을 들여와 채용했으며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1502~1585)가 개량해 지금에 이른다.

 

(태)양력 = 그레고리력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한 역법. 계절이 바뀌는 주기를 근거로 하여 만든 것으로, 1년을 365일, 4년마다 윤년을 두어 366일로 하고, 100년마다 윤년을 1회 줄여 400년에 윤년을 97회로 정하였다.


(태)음력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 1년을 열두 달로 하고, 열두 달은 29일의 작은달과 30일의 큰달로 만들었다. 회귀년에 관계없이 30년에 11일의 윤일을 두었다.

우리나라는 1896년까지 음력(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다년호(또는 연호)란 임금/군주가 즉위한 해부터 붙이던 칭호다.

 

단군기원력

 우리나라의 경우, 단기(檀紀,=2009년 현재 단기 4342년)를 쓰고있으며 고대에는 각각 연호를 사용했었다.1896년 그레고리력을 도입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단기 계산 : 서력 기원 + 2333년)

 

불교에도 불기라는 것을 쓰는데 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은 1873년 서력을 들여왔으나 오늘날까지도 주로 연호(와레키(和暦))를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헤이세이 2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