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5.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 BC 492~448)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BC 521~486)가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전쟁.

 그리스의 지원하에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인들이 잦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근본적으로 막기위해서 그리스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스 원정만을 들어 BC 492~479로 한정하기도 한다.

 

그리스측(아테네,스파르타 : 보병) :: 페르시아측(보병,궁병,기병)

 

 BC 492년 트리키아,마케도니아 공략. 1차원정 시도. 태풍으로 궤멸.
 BC 491~490 1차침공(2차원정). 마라톤전투.
 BC 480년 2차 침공(3차원정). 테르모필레전투, 살라미스 해전

 BC 479년 플라타이아이, 미칼레전투 - 페르시아 그리스에서 철수

 

마라톤 전투(Marathon,BC 490)
 대규모 해군을 조직 에게해를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손쉽게 상륙하여 에레토리아를 공략하고 주병력을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 해안에 상륙시킨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종교적인 행사를 이유로 늦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스파르타가 지원할 때까지 방어하는것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나 밀티아데스가 공격을 주장.결국 시민들을 설득시켜 시민병과 함께 마라톤으로 향한다.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에 주둔한 병사외에 일부를 배에 태워 아테네를 향해 보낸 상태였다. 마라톤으로부터의 공격과 아테네 상륙부대의 협공을 노린 것이었다. 밀티아데스는 빠른 공격과 재빠른 퇴각이 아테네를 살릴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군의 방진 대형에 맞서 양익을 강화시킨 대형으로 전진했다. 중심부는 속도를 줄이고 양쪽 측면은 속도를 높여 결과적으로 중심부는 고전을 하고 있었으나 강력한 양측으로 뚫고들어가 페르시아 군을 포위했고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군은 기민한 아테네군의 공격에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은 승리를 알리는 전령(이름은 페이디피데스)을 먼저보내고 빠른 속도로 회군해 아테네로 돌아왔다.배를 통해 공격하려던 페르시아 군대는 헤라클레스 신전을 방어중인이 병력들을 보고 승패가 갈린 것을 알게되어 회군했다

 

* 이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사자가 아테네까지 달려간 데서 마라톤 경주가 생겨나게 된다.

현재 마라톤 지정 거리는 42.195Km지만 당시 실제 달린 거리는 이에 못미친다고 한다.

 

테르모필레 전투(Thermopylae, BC 480) 테르모필라이/테르모퓔라이등...
 특히 레오니다스를 포함한 스파르타의 300명의 정예병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리스 중부 라미아의 남쪽에 있던 길. 아테네에서 테살리아로 통하던 좁고 험한 길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7000여명의 보병을 이끌고 약 7일간 페르시아군을 방어한 곳이다. 아르테미시온과 함께 방어선을 펼쳤다. 실제 전투는 4일정도 벌여졌다고 하며 좁은 길을 막아 페르시아 대군의 진격을 늦춘 전투.

 결국 그리스인 배신자에 의해 샛길로 돌아온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와 그의 병사들은 모두 전멸 당하게된다. 페르시아군은 이후 아테네로 진격해 시가지와 신전을 불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테로모필레 전투는 육지에서의 페르시아 공격을 어느정도 늦췄으며 일부에서는 아르테미시온 함대가 퇴각하는데 간접적인 도움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살라미스 해전(Salamis,BC 480) 세계(유럽) 3대 해전의 하나.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3차 침공을 한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침공 이전부터 막강한 페르시아 해군에 대항하기위해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3단 노선(Trireme)을 건조했다. 숫자는 페르시아군에 비해 적은 숫자만이 확보되었으나 질적으로는 뛰어난 함선이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페르시아군은 재해와 전투로 인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여전히 다수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와 아티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군을 유인했다. 크세르크스는 이미 원정목표를 달성한 상태였으나 승기를 잡은 이상 아테네 해군을 섬멸하는것도 좋은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대규모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모여들었다.

 아테네는 좁은 해협에서 대형이 흐트러진 페르시아를 상대로 빠른 속도와 충각을 이용해 치고받았다. 더구나 폭풍까지 불어 우왕좌왕하던 페르시아군은 400여척에 이르는 배가 침몰되거나 포획되었고 아테네 함대는 40여척을 잃었다. 이 해전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을 구했을 뿐아니라 지중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 역사 기록상 최초의 대해전.

 

 전쟁 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해진 도시국가는 아테네였다. 아테네는 에게해(Aegean Se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중심 국가로서 주변 국가들과 델로스 동맹(Delos,BC 478)을 맺었다. 델로스 동맹은 해상 동맹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아테네는 도시국가이자 그리스 문명의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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