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2.

레판토 해전

 1571년 10월 7일.

 

 그리스의 레판토(Lepanto) 항구 앞바다에서 기독교 연합(신성연합,크리스트 연합)과 오스만 제국이 벌인 16세기 최대의 해전.

 

 (서양)최초의 화력전이자 갤리선 시대 최후의 전투로 불리우기도 한다.

 

기독교 함대

에스파냐, 베네치아, 로마 교황(비우스 5세),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의 연합

에스파냐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했다.

주요 세력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에스파냐.

(갤리 208, 갈리아스 6, 약 8만 4천명)

- 화승총, 머스킷병. 석궁수

- 갈레아스(갈레아차)

  갑판위에 포좌를 배치한 육중한ㅡ일반 갤리의 2배크기ㅡ갤리함. 30문의 대포를 배치.

- 일반갤리선 : 뱃머리 5문의 대포

 

투르크함대

알리 파샤 지휘.

주요 세력은 이슬람 해적.

(갤리(대) 210, 갤리(소) 63, 약 8만 8천)

- 복합궁수 위주

- 일반갤리선 : 뱃머리 3문의 대포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 후 오스만 제국은 팽창 위주의 정책을 펼쳐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럽을 향해 서진하고 또한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1570년 베네치아의 소유인 키프로스섬을 오스만 투르크가 공격하자 베네치아는 로마,에스파냐등에 도움을 요청. 교황이 상징적으로 중심에선 연합군 결성해 전투를 벌이게 된다.

 

 당시에는 상대 함선에 올라가 지상전처럼 싸우는 형태(Boarding:접현전)과 충각을 이용한 충돌 공격(Ramming)등이였으나 이 전투에서는 대포(함포)에 의한 공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대규모 함대전인만큼 전통적인 방식의 교전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갈레아스의 함포가 위력적ㅡ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ㅡ으로 작용 했다.

 

 전투는 화력과 기술적 우위를 지닌 기독교측의 승리로 결판 났으며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과는 달리 각국이 얻은 실질적인 이익은 거의 없었다. 대신 강력한 함대를 갖춘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유럽인들의 사기를 높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유럽은 투르크가 새로운 함대를 구축하기 전까지 아주 한시적으로 지중해를 장악한다.

 

- 해전에 있어 레판토 전투는 갤리선과 범선, 접현전과 화력전의 경계로 삼기도 한다.

- 이 해전에서 사용된 대포는 소형이었으며 인명 살상용정도 였다고도 함.

- 영국은 헨리 8세 제위시절 배위에 함포를 장착했으며 이후 갑판아래에 함포를 넣었다.

  1513년경 매리 로즈호 와 그레이트 해리호를 건조.

 

* boarding : 널판장(대기), 판자울 = 갈고리등을 이용해 적전과의 간격을 좁힌후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 직접 칼이나 무기를 들고 벌이는 바다위의 지상전. 선상에 기어올라가거나 줄을 이용해 적선에 뛰어드는 것등 모두 포함한다.

 

볼만한 자료

-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3부 레판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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