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dred Years' War, 1337~1453
百年戰爭
거의 100년간 간헐적으로 거듭된 영-불전쟁. 기옌과 플랑드르를 둘러싼 이해 관계때문에 발생한 싸움으로 영국이 프랑스에 침입하면서 발발. 프랑스 왕위권 계승문제가 겹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띈 전쟁이다.
유럽 국가주의의 시초가 된 전쟁이라고도 하다.
초기 크레시,푸아티에 전투등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궁지에 몰렸으나 샤를 5세에 의해 안정화 되었다. 샤를6세때 내부 혼란으로 헨리 5세에게 아쟁쿠르에서 패하고 그의 아들 헨리6세가 양국의 왕이 된다. 샤를 7세때 잔다르크등의 활약으로 전환점을 이뤄내 칼레 이외 지역의 영국군을 몰아내며 전쟁이 끝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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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년 슬로이스 해전(6. 23.)에서 영국이 승리 했으나 지상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는 크게 크레시 전투까지 이어진다.
몇년간의 휴전기 이후 브르타뉴 계승전쟁이 불거진다.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1345년 카엔 전투(7. 26.), 블랑셰타크 전투(8. 24.)등 영국 승리.
1346년 8.26. 크레시(Crecy) 전투 - 에드워드 3세 대 필리프 6세
영국군과 프랑스 크레시 숲에서의 전투. 에드워드 3세는 궁병과 중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코탕탱(Cotentin)반도로 상륙시켜 영국군이 주변지를 약탈하며 남하하자 이에 대응해 필리프 6세는 중기병 중심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프랑스군의 출진을 안 영국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부 프랑스 병력과 전투를 벌이며 크레시에 집결한다. 프랑스군은 신속히 북상해 전투 당일 정오에 크레시에 도착한다.
영국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장궁병 중심으로 언덕 경사면에 역 V자로 포진한다. 기병들도 내리게해 보병대를 구성. 양익의 장궁병 전방에는 기병의 진출을 막는 장애물을 설치했다.
프랑스는 대군이었으나 지휘체계가 제각각이었고 장기간 이동후 휴식도 취하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제노바 석궁병을 앞에 중기병을 뒤에 놓았다.
전투는 영국식 장궁(English Longbow)이 프랑스 중기병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석궁보다 장궁의 효율이 좋았을뿐 아니라 행군동안 비에 맞은 석궁이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장시간 행군을 하고 정리도 안된 상태에서 바로 전투를 벌인 탓에 석궁병 본래의 공격력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패배를 직감하고 도망치던 석궁병들은 자기편 중기병들에게 사살 당했다.
프랑스 중기병은 자존심과 기사로서의 우월감을 뽐내며 줄을 맞춰 돌진했으나 영국군이 설치한 장애물과 경사,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된 땅등에 의해 별다른 공격을 하지 못했다.
영국 장궁병과 보병들은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프랑스 귀족의 1/3이
전투가 끝나고 영국은 프랑스 부상병들중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보이는 사람은 모두 죽였으며 포로중에도 몸값이 되는 자만 골라내고 즉결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1356.9.17~9.19 푸아티에(Poitiers) 전투 - 에드워드 흑태자 대 장 2세
9월 17일에 접전이 벌어졌으나 다음날 9월 18일 하루 동안 휴전을 한다. 이 하루 동안 영국군은 푸아티에 남쪽 늪지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흑태자는 에드워드3세의 아들로 크레시 전투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크레시와 비슷하게 기병이 힘을 못쓰며서 패퇴당한다.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프랑스에 불리한 브레티니 조약과 칼레 조약(1360)에 동의하게 된다.
1415년 아쟁쿠르(Agincourt) 전투 - 헨리 5세
궁병 및 보병 위주의 영국군이 중기병위주의 프랑스군 섬멸. 전투 전에 헨리 5세가 성 그리스핀 축일 연설(St. Crispin's Day Speech)을 했다고하는데 이 연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함.
1428.10~1429.5 오를레앙 포위전
영국군이 오를레앙 요새를 포위해 벌어진 전투. 영국이 유리했으나 17세의 소녀 잔다르크가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eans)
잔다르크(Jeanne d'Arc, 1412-31)
아르크의 요안나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주로 깃발을 들고 말 위에 올라탄 여기사로 그려진다.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중무장을 한 채 군을 이끌었다. 남자가 많은 군대에서 활동하기 편하면서 정조를 지키기위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무기를 들기는 했으나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깃발을 들고 독려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고 한다.
백년전쟁은 잔다르크의 등장 이 후 프랑스가 우세하게 진행되었다.
'전보, 라디오, 프랑스, 걸스카우트, 순교자, 포로, 여군, 강간 피해자, 군인'의 수호 성인이라고 하며 1차 대전등에서 사기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활동(propaganda)에 사용되기도 했다.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태어남
1424년 계시를 받음.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
- 영국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샤를 7세)을 왕위에 올리라는 내용
1428년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백작을 찾아 샤를 대공이 있는 시농 성으로 갈 수 있도록 부탁.
- 주변의 도움과 열성적인 설득끝에 허락을 받고 시농 성으로 가 샤를대공을 알현.
- 푸아티에에서 프랑스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도덕성 심사를 받아 프랑스군으로 참여를 허가받음.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 요새에 도착.
- 오를레앙 백작은 탐탁치 않게 생각해 작전에서 제외시켰으나 홀로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지지를 받았고 뒤이어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 뛰어든다.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오를레앙에서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군에게 두터운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자 하느님이 보낸 성녀로서 알려진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에서 요새를 방어하다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힘.
-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프랑스에 몸값을 제시했다. 그 사이 잔 다르크는 여러 번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에 영국에 넘긴다.
-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으로 압송.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다. 전적으로 영국에 유리하게 재판진행되었고 수녀원이 아닌 병사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수감한다.
1431년 5월 29일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
1431년 5월 30일 군중들 앞에서 화형.
- 유골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3번에 걸쳐 태워 재는 센 강에 버려졌다.
1456년 7월 7일
- 프랑스. 샤를 7세가 명예회복재판을 열어 잔 다르크가 무죄임을 밝혔다.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잔 다르크를 성녀로 시성. 축일은 5월 30일.
* 라퓌셀(La Pucelle,처녀)
잔 다르크를 잔 라퓌셀(Jeanne La Pucelle)이라고도 표현함.
후일 잔 다르크를 기려 그녀가 태어난 작은 마을의 이름인 동레미에 라퓌셀이 추가되어 동레미라퓌셀이 됨.
- 잔 다르크가 실질적으로 뛰어난 전술가이자 군인이라는 설과 단지 사기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는 설이 있다.
- 그녀가 보았다는 계시는 간질에 의한 환상과 환청이라는 의견도 있음.
- 샤를 7세 혹은 프랑스 지배층 일부에서 그녀의 신성성과 대중적인 인기,힘을 우려해 그녀가 영국으로 가도록 혹은 갈때까지 방치되도록 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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